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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골프코스

소피아그린CC 골프 코스 자세히 살펴 보기

소피아그린CC 골프 코스 자세히 살펴보기

소피아그린CC 골프 코스 조감도

 

소피아그린 컨트리클럽 108 Par, 전장 9,581m의 코스규모

소피아그린CC의 코스는 세종코스(Par36, 3,204m), 여강코스(Par36, 3,148m), 황학코스(Par36, 3,229m), 27홀로 초보에서부터 수준급 골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코스레이팅을 구성하였습니다. 각 홀에는 Blue, White, Gold, Red 티를 설치하여 연령별, 기량별로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운영 중이며 홀별 난이도에 따라 연못 및 86개의 벙커를 적재적소에 배치시켜 매 홀별 플레이에 묘미를 더했습니다.

 

소피아그린 컨트리클럽

소피아그린 컨트리클럽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실시간예약 및 안내 제공

sophiagreen.co.kr


세종 코스

세종대왕은 여주 영릉(英陵)에 잠들어 계십니다.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의 정점입니다. 문자와 말이 달라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우리를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세종의 뜻을 되살리고자 아홉 개의 홀에 아름다운 순우리말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우리말들이 잊히지 않고 날로 쓰이어 후세에도 세종의 애민정신이 길이길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Course Rating: 36.7

 

1번 누리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1번 홀

‘누리’란 1527년 훈몽자회에서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지는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입니다. 온 ‘누리’의 백성이 쉽게 익히고 사용하여 자신들의 뜻을 ‘시러(能히)’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세종의 애민정신(愛民精神)을 기리고자 첫 홀의 이름은 ‘누리’라 하였습니다.

(용례) '아직 해방의 감격이 온 누리를 뒤엎어 소용돌이칠 때였다.' ≪전광용, 꺼삐딴 리≫

 

2번 다솜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2번 홀

'다솜'이란 애틋하게 사랑함을 뜻하는 순우리말로 옛말인 'ᄃᆞᆺ오다'의 명사형 ‘ᄃᆞᆺ옴’을 현대 국어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오늘 같이 좋은 날 동반자 분들과 애틋한 우정과 사랑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3번 더기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3번 홀

'더기'란 고원의 평평한 땅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용례) ‘개울 건너 완만한 더기에 과녁판이 세워져 있었다.’ ≪ 김원일, 노을 ≫

 

4번 마루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4번 홀

월인석보(月印釋譜)에서 'ᄆᆞᄅᆞ'로 등장하는 '마루'란 등성이를 이루는 지붕이나 산 따위의 꼭대기를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용례) ‘서거칠은 승달산 마루에 뎅그렇게 걸린 해를 보면서 일어섰다.’ ≪문순태, 타오르는 강≫

 

5번 송알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5번 홀

‘송알송알’이란 땀방울이나 물방울 또는 꽃이나 열매 따위가 잘게 많이 맺혀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입니다.

(용례) ‘아직도 그럴듯한 그림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초조한 표정을 짓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김 기자가 무비 카메라를 땅바닥에 놓고 소대장에게로 가서 다시 지시했다.’ ≪안정효, 하얀 전쟁≫

 

6번 아람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6번 홀

‘아람’이란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정도가 된 상태, 또는 그런 열매를 말합니다.

(용례) ‘흔들지도 않는 밤나무 가지에서 남은 밤송이가 저 혼자 아람이 벌어져 떨어져 내렸다.’ ≪황순원, 학≫

 

7번 우금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7번 홀

‘우금’이란 시냇물이 급히 흐르는 가파르고 좁은 골짜기를 말합니다.

(용례) ‘사람의 발길이 끊긴 우금에 숨어산 지 이태...’ ‘장마철에 우금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KBS 우리말 겨루기 526회 ≫

 

8번 하늬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8번 홀

‘하늬’는 우리말 ‘하늬바람’ 즉 서풍(西風)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린의 방향이 북서쪽 이므로 석양너머 불어오는 ‘하늬바람’이 어떤 클럽을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더하게 하는 홀입니다. 때에 따라 등 뒤에서 불어오는 ‘샛바람’(東風)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용례) ‘그리 세지 않는 하늬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가끔 눈가루가 날고 멀리서 찌륵찌륵 꿩 우는 소리가 들려와서 더울 산중의 고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우휘, 사도행전≫≫

 

9번 한울홀

소피아그린CC 세종 코스 9번 홀

‘한울’ 이란 하늘을 이르는 말입니다. ‘한울’은 ‘크다’의 의미를 지닌 접두사 ‘한一’과 대명사 ‘우리’의 준말인 ‘울’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용례) ‘한울의 뜻을 어기는 것은 큰 재난을 불러들이는 불씨인 겁니다. ’ ≪한승원, 해일≫


여강 코스

‘물’은 여주의 상징입니다. 여주는 충주를 관통하는 달천(達川, 달래강)과 강원도와의 경계에서 유입되는 섬강이 합수되는 절묘한 지형입니다. 예로부터 경기 제일의 농경문화를 꽃피운 산하(山河)와 중요 지점마다 여러 나루터가 있던 여주는 교통은 물론 문화의 집산으로 국가경제의 한몫을 담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이곳 주민들이 불러왔던 남한강의 옛 이름 ‘여강(驪江)’의 120리 뱃길을 따라 물이랑을 내 듯 따라가는 아홉 개의 라운드는 자연스레 여주의 역사와 문화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 Course Rating: 36.2

 

1번 파사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1번 홀

파사성(婆娑城)은 임진왜란 중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북상하는 왜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남한강변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판단에 의해 수축되었다. 현존하는 산성의 상당 부분은 조선시대 유성룡의 발의로 승장(僧將) 의엄(義嚴)에 의해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6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 대신면 천서리에 위치한 파사산(婆娑山, 해발 230.5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발달한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으며, 처음 축조된 시기는 삼국시대로 확인되었는데 어느 시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 파사왕대 (80~112) 혹은 삼한의 소국인 파사국(婆娑國)의 존재에서 유래한다고 이야기가 전해온다. 둘레는 935.5m이고 내부면적 약 4,000㎡, 최대높이는 6.25m이다.

 

2번 매산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2번 홀

매산서원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29~139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조 때에 경남 거창과 산청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건립되었다. 삼우당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친분을 감안하여 삼우당과 목은을 추향하고 매산(梅山)이란 이름으로 사액받았다. 병자호란 때 후손인 문겸(文兼)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춘추로 제향 해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1868(고종 5년)에 훼철된 이후 삼우당의 후손으로 여주경찰서장에 취임한 문광규(文光圭)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의 마당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150년의 향나무가 드리워져 있어, 서원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3번 창남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3번 홀

교통의 요지였던 여주에는 120리 여강(驪江) 뱃길을 따라 크고 작은 18개의 나루가 있었다. ‘창남’나루는 학생들의 통학수단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운영되었던 나루의 이름이다. 여주를 관통하는 남한강은 중부 내륙과 한양을 연결하는 수송로이며, 조선시대 영남지방과도 연결되는 교통로의 주축이었다. 또한, 여주의 여러 나루 들은 국가의 공식적인 수운(水運) 기능뿐만 아니라 한강 하류와 서해안의 해산물을 한강 상류인 충청도와 강원도로, 강원도의 임산물을 한강 하류로 교역하는 남한강의 주요 지점이었다. 이렇듯 국가경제 순환의 혈관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여주 사람들의 발이 되었던 18개의 나루는 육상교통으로 전환되면서 1999년 창남나루를 끝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대표적으로 큰 나루로는 조포나루, 이포나루, 창남나루, 여주나루와 흔암나루 등이 있으며 많은 양의 쌀과 곡식, 가축, 소금 등이 집산되어 이입(移入), 이출(移出)되었고, 떼배가 묵어가는 주막과 술집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루터였음을 알 수 있는 표지석 등만이 남아 예전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4번 영릉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4번 홀

영릉(寧陵)은 우암(尤庵), 매죽헌(梅竹軒)과 함께 북벌의 꿈을 키우던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孝宗)과 그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동원이릉(同原異陵), 쌍릉(雙陵)이다. 원래는 건원릉(健元陵, 태조의 능묘, 현 구리시에 소재) 서쪽 능선에 병풍석을 갖춰 모셨으나, 1673(현종14) 석불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세종의 능묘인 영릉(英陵)의 동쪽 홍제동(弘濟洞)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천릉의 조성 시 “왕릉혈(王陵穴)뿐만 아니라 그 아래 혈(穴)도 아주 길(吉)하다”는 민유중의 주장을 수용해 구릉의 위쪽에는 왕릉을, 아래쪽에는 왕비릉을 모신 독특한 장법을 사용하였다. 한편, 여주에는 효종과 함께 북벌을 도모하거나 배청(排淸)에 적극 가담한 매죽헌 이완, 기천 홍명하, 탄수 원두표, 송국준, 회곡 조한영의 묘가 있고 우암 송시열의 대로사가 있어 죽어서도 효종과 북벌의 뜻을 함께하며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셈이다.

 

5번 중암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5번 홀

중암리(中巖里) 가마터는 고려 초기 백자의 발생 및 발달과정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도자사(陶瓷史)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여주지역 가마터는 모두 84기에 달하는데, 이 가마터들은 고려초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도자 역사의 전시기에 걸쳐 분포해 있어 여주가 천년의 도자 역사를 간직한 도자기의 고장임을 실감케 한다. 특히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는 해무리굽 완, 발, 화형접시, 잔, 잔탁, 호, 대반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려 초 여주의 고달사와 원향사가 선종사원으로 크게 번창하며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최대의 융성기를 맞았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중암리 고려백자 가마터에서의 백자 제작은 좌선수행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차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6번 청심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6번 홀

여주 관아의 객사(客舍)였던 청심루(淸心樓)는 서울의 낙천정,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제주의 관덕정, 남원의 광한루와 더불어 유명한 누정 가운데 하나였다. 여주 강변의 여러 누정(樓亭) 중에서 가장 이름난 누각이었는데, 청심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동대(東臺, 다층전탑)가 아득히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래로 오가는 돛단배들이 그림처럼 전개되는 등 경관이 뛰어났다.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람하며 글을 남겨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를 비롯한 약 40여 명의 시판(詩板)이 걸려있었다 하는데, 애석하게 해방 직후에 소실(燒失)되어 주춧돌만 일부 남아 있다가 여주초등학교가 들어서고 강변도로가 개설되면서 그 흔적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1987년에 청심루가 있던 자리에 표석을 건립하였다.

 

7번 마암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7번 홀

영월루 바로 아래의 절벽 바위는 예로부터 ‘마암’이라고 불리던 유서 깊은 곳이다. 여주를 대표하는 관성(貫姓) 중의 하나인 여흥 민씨는 마암 바위의 구멍에서 시조가 탄생했다 하여,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 바위 불가에서 여주 지명의 유래(由來)가 되는 황마(黃馬:누른 말)와 여마(驪馬:검은 말)가 출현하여 마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의 지명도 고려 때 황려(黃驪)라 불렀다고 한다. 이 고장 출신 대문호 이규보의 한시 중에 “두 마리 말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황려라네”(雙馬雄寄出水涯, 縣名從此得黃驪)라고 읊은 내용이 있어 그 역사성이 매우 높은 유적이다. 또한 이규보, 이색, 서거정, 최숙정, 김상헌, 정약용, 김창협 등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마암에 찾아와 시와 풍류를 즐기던 명소였다. 현재 평평한 바위면에 ‘馬巖’이라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전후사정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8번 영월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8번 홀

영월루(迎月樓)는 앞으로 흐르는 ‘여강(驪江)’과 천년고찰 신륵사가 내려다보이는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상동 영월루공원의 산정부에 위치한 누정으로 마암(馬巖)이란 글씨가 새겨진 절벽 위에 있다. 이 자리는 서하군(西河君) 임원준(任元濬, 1423~1500)이 만든 사우당(四友堂)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현 누각은 본래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인데 1925년 여주관아가 근대식 건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당시 군수 신현태가 옮겨 보존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명칭도 ‘기좌제일루(畿左第一樓)’에서 현 영월루로 변경되었다.

 

9번 흔암홀

소피아그린CC 여강 코스 9번 홀

흔암리 선사유적(欣岩里 先史遺蹟)은 탄화된 벼, 보리, 조, 수수, 콩 등이 발견되어 청동기 혼합 농경문화를 가늠할 수 있고,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동북지역요소와 서북지역 문화요소가 섞여있는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점동면 흔암리 산 1-1번지 흔바위 부락의 뒷산(해발 123m)에 위치해 있으며, 1972년부터 1978년까지 7차에 걸친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고고인류학과의 합동 발굴조사로 집터 16기가 발견되었다.


황학 코스

‘황학산(黃鶴山)’은 여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여강’ 주변의 비옥하고 너른 충적평야의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황학산 주변의 너른 들은 예로부터 임금께 진상했던 것으로도 이름이 높은 전국 제일 품질의 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여주는 비옥한 토지만큼이나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기도 하고, 덕망 높은 선조들이 애착을 갖고 오랜 기간 기거했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때론 치열하기도 하고, 때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간 선조들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황학(黃鶴)코스’ 아홉 개의 라운드에 담아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선조들의 삶과 풍류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Course Rating: 36.6

 

1번 서희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1번 홀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성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 자는 염윤(廉允)이다. 960년(광종11) 3월에 18세의 나이로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983년(성종2)에 정1품 태보· 내사령이 되었다. 993년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을 맞아 침략의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고 ‘송과의 외교 단절’ 및 ‘요와의 국교수립’에 있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반박하고 ‘송과의 외교는 여진의 방해 때문에 요와의 외교가 불가함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설득, 명분 있는 소손녕의 철군을 유도하였고 이후 여진족을 축출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청천강 이남으로 축소된 영토를 청천강 이북으로 확대하는 쾌거였다. 998년(성종17) 병졸하였고 묘는 여주시 산북면 후리 상두산에 있다.

 

2번 백운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2번 홀

백운거사(白雲居士)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장가로 ‘사종(詞宗)’이라 일컬어지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호이며 글을 잘 지어 이미 9세 때 기동(奇童)이라 이름이 나 있었다. 본관은 여주이며 술을 좋아해 세 차례나 사마시에 떨어지고 22세 때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만 2,000수 이상의 시를 남길 정도로 시를 사랑한 이규보를 두고 최자(崔滋)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가 없는 천재의 준일(俊逸)한 분’이라 평했다. 노후에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 태평세월의 농수(農叟)가 되려는 결심을 했지만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임금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한 후 그곳에서 74세를 일기로 졸(卒)했다.

 

3번 목은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3번 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말 삼은(三隱)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성균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75년(우왕 1) 판삼사사를 역임하였다. 목은은 평소 여주로의 ‘귀거래(歸去來)’를 입에 달고 살았을 만큼 자신의 유배지이자 부친 이곡(李穀)의 유배지인 여주를 사랑한 인물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에 반대하여 역모로 몰려 귀양을 갔다가 조선 개국 후 유배에서 풀려났고, 이 무렵 태조 이성계는 옛 친구의 예로 한산백(韓山伯)에 봉한 후 토지를 내렸으나 끝내 거절하여 받지 않았다. 이성계는 목은을 각별히 대하여 종종 왕궁으로 초빙하여 융숭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1396년(태조5)에 목은이 다시 여강에 도착하였는데 임금이 보내온 술이라며 경기감사가 전해 준 술을 마시고 배 안에서 졸(卒)했다.

 

4번 매죽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4번 홀

매죽헌(梅竹軒)은 조선 현종대의 무신 이완(李浣, 1602~1674)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1650년(효종 1)에 어영대장이 되었다. 강직한 성품으로 수어사로 있을 때 휘하의 문관이 죄를 지어 죽게 된 일이 있었는데 인선왕후를 통해 구명을 사청 (私請)했으나 거절한 것과 훈련대장으로 임명받자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왕족의 이웃에 산다는 것은 법도가 아니라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이웃에서 이사를 해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무장으로 입신 후 효종에게 발탁되어 송시열과 여주의 문신인 원두표와 함께 북벌에 매진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조·형조판서 역임 후 1674년(현종15) 5월에 우의정이 되었으나 그다음 달에 졸(卒)하였다. 묘는 상거동에 있다.

 

5번 우암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5번 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숙종대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다. 우암은 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현 대로사(大老祠)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바라보며 비통해하였다 하며, 이에 1785년 정조가 우암을 제향 하기 위해 대로사를 짓게 하고 사액을 내렸다. 대로사의 대로(大老)란 명칭은 정조가 친히 지은 이름이며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이고 [맹자]에 그 용례가 보인다. 김장생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27세 때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져 1635년 후에 효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효종이 즉위할 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힌 글인 기축봉사(己丑封事)가 효종의 북벌의지와 부합하여 북벌계획의 핵심인물로 발탁되었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에도 불구하고 거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사림의 중망 (重望)등에 힘입어 막후에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6번 반계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6번 홀

반계(磻溪)는 실학의 비조(鼻祖)인 류형원(柳馨遠, 1622~1673)의 호이다. 그는 고통받는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며 백성들의 삶 속으로 뛰어든 인물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며 세종 때 선초삼청(鮮初三淸)중의 한 분인 류관(柳寬)의 9세손이다. 여주와의 인연은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피난을 갔다가 22세 때부터 여주 백양동, 지금의 능서면 백석리와 내양리 부근에 정착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반계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은 여주에 정착한 때부터 써졌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 상황과 국민 생활이 도탄에 빠진 원인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 있고 여기에서 벗어나 모든 신분의 사람이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며 제 몫을 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균전제(均田制)로의 토지개혁, 병농일치(兵農一治)의 부병제 실시, 조세 및 녹봉제의 정비, 과거제 폐지와 공거제 실시, 신분제 및 직업세습제의 개혁 등을 설파하였다. 32세 때부터 전라도 부안에서 은거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7번 명성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7번 홀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 1851~1895)는 광무(光武) 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아버지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 (閔致祿)이고 어머니는 이규년(李圭年)의 딸이다. 1851년(철종2) 여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무척 영리하여 민치록은 일찍부터 글을 가르쳐 주었다. 명성황후가 어릴 때 공부하던 방이 있던 곳에 지금은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가 서있다. 여주를 떠나 한양 감고당에서 생활하던 중 1866년(고종3) 3월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타고난 총명을 바탕으로 대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읽으며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명성황후는 남편인 고종을 중심으로 한 왕권중심국가를 소망했기 때문에 급진개혁파들과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을 통해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이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승리한 일본 세력의 침투를 막기 위해 러시아세력을 이용한 정책을 추진하던 중 1895년(고종32) 10월 8일, 45세의 일기로 새벽 일본인들의 칼에 무참히 시해당하였다.

 

8번 창의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8번 홀

13도 총 창의대장(倡義大將) 이인영(李麟榮, 1867~1909)은 여주 북내면 교향동 출신으로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학자였다. 1895년 을미사변 발발 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으나 큰 성과 없이 1896년 광무황제의 선유문을 받들어 의진을 해산하고 문경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후 1907년 8월 이은찬과 이구재의 요청에 의해 관동창의대장으로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1907년 11월 양주로 각도 의병장들이 모여 13도 연합의병 1만 명이 결성을 추진하였고 이인영이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8년 음력 정월을 기해 동대문 30리 밖에서 결성된 전군이 집합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으나, 이인영의 부친 사망으로 인한 문경으로의 귀향과 이 기미를 알게 된 일본군이 각 개별의병대를 타격해 서울 탈환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3년 상을 치르고 13도 창의군 재기를 하겠다며 충북 황간군 금계동에 살던 중 1909년 6월 7일 일군 헌병에서 체포되어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9번 묵사홀

소피아그린CC 황학 코스 9번 홀

묵사(默史) 류주현(柳周鉉, 1921~1982)은 소설가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921년 여주시 능서면 번도 마을에서 류기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 전문부 문과를 수학하고 귀국해 [번요(煩擾)의 거리]로 문단에 등단하였다. 묵사의 창작활동은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등단 초기 1950년대 까지 절제된 문장과 빈틈없는 구성을 통해 [일각선생], [태양의 유산]을 발표하고 예술적 기교를 보였다. 이후 1960년대 까지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붕괴와 4·19 혁명의 성공에 따라 역사를 오도하고 선량한 민중을 기만하는 악에 대한 비판을 주로 하였는데, 완벽한 예술성으로 고발 문학이 가지는 취약점을 극복하며 문단에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이후 말년 까지는 [조선총독부], [대원군] 등의 장편 역사소설을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키었다. 아시아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한국출판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소설가협회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중앙대학교에서 후진양성에도 이바지하였다. 1982년 돌아가 가남면 태평리의 선영에 안장되었다.